PAPER
제지정보
종이의 역사
B.C 2200 ~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것은 100만 년이나 되었지만 문자를 비롯한 기록수단을 사용한 것은 6000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알타미라 동굴에 그려져 있는 위의 그림은 약 2만 2000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인류 최초의 기록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로써 인류는 기록을 통한 진정한 역사로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B.C 2620 ~ 2520

파피루스와 필기도구들
오늘날 종이와 가장 유사한 형태로 평가되는 것은 기원전 2500년경 이집트 나일강가에서 자라던 갈대 모양의 파피루스로 만든 파피루스 용지이다. 오늘날 페이퍼(PAPER)의 어원이 된 파피루스 용지는, 식물성 섬유를 초지하는 단계로 발전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의 종이는 아니다.
B.C 1700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진흙판
기원전 4000년 말경에 제작된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진흙판으로 오늘날의 사전과 비슷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인간이 맨 처음 사용한 기록 재료 중의 하나는 무른 찰흙판에 송곳같이 끝이 뾰족한 것으로 문자를 기록하고 이를 말려 보관한 점토판이었다. 이러한 점토판 문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거대한 점토판 도서관이 남아 있을 정도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다. 이러한 진흙판에 글씨를 새기는 필기 도구로는 갈대나 나뭇조각 등을 깎아 만든 첨필을 사용하였다.
B.C 800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제조방법
이집트인들은 파피루스 줄기를 가느다란 조각으로 자르고 이것을 겹쳐 붙인 다음, 한 켜 위에 다른 켜를 90도로 덧붙여 건조시킨 뒤, 전분풀을 이용해 약 20장 정도의 파피루스를 세로로 이어 붙여 3.5~4.5CM 또는 7~8CM 길이의 두루마리 파피루스 용지를 만들었다.
A.D 25 ~ 220

타밀 책자
대나무 조각을 문자 기록의 재료로 사용한 것은 중국뿐만이 아니었다. 사진은 인도 남부에서 발견된 타밀 책자의 한 부분으로 대나무 조각을 실로 연결한 다음 글을 써넣었다. 고대 인도 지역에서는 이외에도 경전을 기록하는 데 종려나무 잎을 이용하기도 했다.
A.D 600

갑골문자
고대 중국 은나라의 수도인 은허(殷墟)에서는 10만여 개의 갑골 조각이 출토되었다.
이 갑골에는 대체로 붉은색이나 검은색으로 글자가 쓰여 있는데, 어떤 것은 글자를 쓴 다음에 새긴 것도 있고 글자를 새긴 후에 붉게 칠한 것도 있다.
105

중국 한나라 시대의 채륜
중국 한나라 시대(25~220)의 관리 채륜은 최초로 종이를 발명했다고 알려져 있다. 채륜은 이미 그 시대에 퍼져 있던 종이 제작과정을 체계적으로 수집·정리하여 공식화했다. 채륜은 그 당시 이미 알려져 있던 과정에다 새로운 소재(낡은 어망, 나무껍질)를 이용하는 방법을 고안해 제지기술 발달에 큰 업적을 남겼다.
300 ~ 500

중국의 종이 제조공정과 종이틀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물에 불린 원료를 가마솥에 넣고 삶아 걸쭉한 펄프로 만든다. 다음에 그 펄프를 통에 담고 종이틀을 사용하여 얇은 섬유막으로 떠낸다. 물기를 빼고 말린 후 종이틀에서 종이를 떼어 내면 완성품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제지술은 빠른 속도로 중국 전역에 전파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점차 제지기술이 개량되어 생산량이 증대되어 지질이 향상되었으며 재료의 종류도 지역에 따라 다양해졌다.
550 ~ 700

중국 최초의 목판인쇄물인 ‘금강경’
종이의 수요증대는 인쇄술의 발전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7세기 말경부터는 나무판에 글자나 그림을 거꾸로 새겨 먹을 발라 종이 위에 찍어내는 원시적인 목판 인쇄술이 발명되었다. 이러한 목판 인쇄술의 발달 덕분에 다양한 종류의 서적을 출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종이의 수요는 더욱 증대되었으며, 수리조건이 좋은 곳에서는 제지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750 ~ 900

중국의 지폐
6세기에 들어서는 종이의 원료에 나무진을 첨가하면 벌레가 해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으며 7세기의 당대(唐代)에는 개량된 물감을 사용한 색종이도 생산되기 시작했다. 8~9세기에 걸쳐 당나라 시인들은 종이에 시나 글을 써서 책으로 묶기도 했다. 종이의 생산은 문화적 발전을 촉진시켰으며, 문화적 발전은 다시 종이의 수요증대를 가져왔다.
1340

화려한 장식의 편지지첩
중국의 목판인쇄술은 1340년 목판에 의한 색인쇄술이 개발되고 나서부터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1644년에 만들어진 이 편지지첩은 16세기 중국 색인쇄술의 발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제지술 또한 송대에 이르러 고급종이에 인물이나 꽃 모양을 인쇄한 비실용적인 납전(蠟箋)을 당시 일부 상류층에서 귀하게 다루었을 뿐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지 못한 채 정체되고 말았다.
600 ~

양피지
유럽에서는 중국의 제지술이 전해지기 전까지 기록의 재료로 양피지와 이집트의 파피루스, 중국에서 수입된 귀하고 값비싼 종이를 조금씩 사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제지기술의 전래는 유럽인들에게는 크나큰 문화충격이었다. 또한 양피지에 필사를 하던 더디고 힘든 작업이 종이의 보급으로 인해 한결 수월해지고 빨라졌다.
751 ~ 1200

유럽의 초기 제지공정
서기 751년에는 유럽의 문화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역사적인 한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은 지금의 투르케스탄 지방의 탈라스강 근처에서 벌어진 당나라와 사라센제국의 전투였다. 당시 고구려 출신의 장수인 고선지가 이끌던 당나라 군대는 '탈라스의 싸움'이라고 불리는 이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그때 포로로 잡힌 고선지의 부하들이 사마르칸트로 잡혀가 아라비아인들에게 제지술을 전파했다. 13세기에 들어서서는 유럽의 주요지역 곳곳에 제지공장이 들어섰다.
1450

구텐베르크와 구텐베르크 성경
유럽으로 건너간 제지술이 급속도로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1450년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자인쇄에 힘입은 바 크다. 이 기술은 급속하게 유럽 전역에 퍼져 1500년경에는 각국에 2백 수십 개에 달하는 인쇄소가 생겨나고 많은 서적이 출판되었다. 당시의 인쇄소는 모두 출판사의 기능까지 겸하고 있었는데, 그 수가 많아짐에 따라 자연히 종이의 수요도 증가하였다.
1550

유럽의 초기 인쇄소 풍경
유럽에서는 종이가 전래된 이후 출판물이 활발히 간행되었으나 주로 종교서적이 중심이었으며 가격 또한 매우 비싸 주요 수요층은 귀족이나 승려계급이었다. 그러나 15세기 말경부터 이탈리아에서 그리스·로마 시대의 고전이 출판되고 점차 그 종류가 증가됨에 따라 종교정치에 대한 비판에 눈을 돌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기초가 되었다. 또 16세기 독일에서는 출판물을 통한 신교사상의 전파가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1648

광고지의 등장
왼쪽의 광고지는 1648년에 발행된 것으로 30년 전쟁의 종결을 알리고 있다. 이 시기부터 종이의 용도는 단지 서적 출판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기록을 위한 재료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따라서 종이의 수요증대에 따른 새로운 제지방법의 필요성이 절실히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1700

루이 로베르(N.L. Robert)가 고안한 최초의 장망식 초지기 모형
1799년 프랑스의 에르오 제지공장에서 일하던 니콜라 루이 로베르(N.L.ROBERT)는 5년간의 연구에 철망을 넓게 편 채로 움직이면서 그물 위에서 종이를 뜨는 장망식 초지기의 모형(좌)을 발명하고, 1804년 세계 최초의 장망식 초지기를 제작·운전하는 데 성공하였다. 오늘날 초지기의 모태가 된 이 기계는 긴 철망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 후 장망식 초지기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 기계로 뜬 종이가 오늘날 양지의 시초가 되었다. 장망식 초지기의 발명 이후 제지공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1800

산업혁명기 유럽의 신문
당시 유럽사회는 산업혁명을 거쳐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과도기였다. 유럽사회에 새로이 대두된 중산층은 신문, 서적, 잡지 등을 활발히 발간했으며, 많은 분야에서 종이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종이의 수요가 격증하여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제지 및 시설의 기계화를 더욱 촉진시켰다.
1850

새로운 제지원료 제조법의 현상공모를 알리는 신문광고
기계에 의한 초지법이 발명된 이후에도 증대하는 신문, 잡지, 서적 등의 발행부수에 비하여 종이생산은 질적·양적으로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특히 질 좋은 원료를 조달하는 데 많은 애로점이 있었다. 그때까지 종이를 만드는 주원료였던 마, 목면, 넝마 등은 공급에 많은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목재섬유를 펄프화하는 연구가 각국에서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1870

1872년형 동력인쇄기
1813년에는 증기기관에 의한 최초의 동력인쇄기가 발명되었다. 이에 따라서 인쇄술도 오랜 세월의 정체에서 깨어나 기계화를 추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처음 인쇄술이 발명되었을 때에는 1시간에 20매 정도가 고작이었는데, 동력 인쇄기는 1시간에 1,000매 이상을 인쇄했다. 인쇄술의 발전에 따른 종이의 수요에 대비하기 위하여 제지술도 눈부신 발전을 했는데, 특히 1871년 윤전기의 발명으로 제지기술은 큰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1900

펠터식 쇄목 그라인더와 20세기 초 미국형 포켓 그라인더
1840년 독일인 켈러(F.G.KELLER)는 최초의 공업용 펄프인 쇄목펄프 제조법을 발명하였다.
뒤이어 1844년에는 염소펄프법과 쇄목 그라인더가 발명되었고 1860년에는 독일인 펠터(VALTER)가 쇄목기(좌)를 완성하였다. 1860~1880년대에는 아황산펄프 등 각종 화학펄프가 개발되었으며, 1907년에는 캐나다에 최초의 크라프트 펄프공장이 건설되어 실용화되었다. 이러한 근대적 제지술의 발달은 각종 신제품의 개발을 촉진해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종류의 종이가 생산되어 대중화되기에 이르렀다.
384

무구정광다라니경
삼국시대는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던 시기였으므로 제지술과 불교의 전래는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중국의 <조지사화(造紙史話)>에는 백제에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384년)가 제지기술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중국의 <송사(宋史)>에는 그 시대에 이미 백무지, 우지, 학청지 같은 종이들이 신라에서 생산되었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제지업이 크게 번성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당시 고분의 구조상 결함으로 섬유질의 보존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물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종이인 신라시대의 '무구정광다라니경'이 남아 있다.
1377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
우리나라의 제지기술 발달은 여타의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인쇄술의 발달과 연관을 맺고 있다.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사용하기도 한 우리 민족은 발달된 제지기술과 인쇄술을 이용해 그 시대부터 이미 활발한 출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800 ~

조선시대의 종이봉투와 편지지
우리 민족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지료 염색에 의한 색지를 만들어 사용한 민족으로 기록되고 있다. 또한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종이봉투를 만들어 사용한 민족이기도 하다.
1870

종이 공예품
한지 공예품들은 조선 중엽부터 구한말까지 궁중이나 사대부, 서민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생활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종이 공예품은 종이의 재료적 특성으로 인해 내구성이 뛰어나고 부드러운 질감과 자연미로 오래도록 사용하여도 싫증이 나지 않아 장식품에서 일반 가재도구에 이르기까지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그 종류는 지장, 지농, 궤, 안경집, 부채, 지갓, 지신, 제기, 우산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심지어는 북방변경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솜 대신 종이를 넣은 종이옷을 만들어 입혔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1884

김옥균
우리나라에 양지 제조를 위한 초지기가 최초로 도입된 것은 1884년 마포 양화진에 일본으로부터 탁송된 제지기계가 도착하면서부터이다. 1881년 4월, 62명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이 일본 대장성 인쇄국 초지부를 시찰하는 과정에서 서양식 제지시설을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그 후 1883년 김옥균이 도일하여 구매계약을 체결함으로써 그 일부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1902

우리나라 최초의 제지공장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김옥균이 관여한 모든 일들이 백지화되기에 이르러 자연히 제지시설 도입 건도 일시 중단되었다. 이에 일본정부가 대금지불을 독촉하자 조정에서는 1888년 정식으로 기계구매계약을 체결하였다. 이 기계는 2대의 환망식 초지기로 용산의 전환국 조지소에 설치되어 고종 39년(1902년)부터 지폐 용지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공장은 1907년 증설이 시작되어 융희 3년(1909년)에는 목조건물 2층에 연건평 216평에 연간 약 80만 매의 생산능력을 보유한 제지공장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경술국치 이후 1911년 폐쇄되어 그 시설은 총독부 중앙시험소로 이관되었다.